북한에서 월경해 온 3명의 소년. 이가 있다고 머리를 박박 깎고 있었다. 왼쪽부터 17, 15, 13세. 모두 부모가 돌아가거나 행방 불명 상태였다. 배후의 산은 북한. 1998년 4월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 촬영 이시마루 지로

'기민(飢民)'의 발생

북한에서 중국으로 기민이 들어오는 것 같다.

이런 정보가 내게 간간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95년 말경이었다고 기억한다. 1996년에 들어서자 북한을 비즈니스로 왕래하는 재일 조선인 지인으로부터 "평양에서 지방 도시에 나가면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에 맞닥뜨린다. 굶주린 사람들이 식량을 구하려 방황하고 철도역 등에서는 시체가 뒹굴고 있는 것도 있다"라는 말을 듣게 됐다.

'설마 그렇게까지'라는 믿기 힘든 생각과, '아니, 있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라는 찜찜한 예감이 엇갈렸다.

북한 경제가 상당히 나쁜 것 같다는 이야기는 80년대 중반 무렵부터 들려왔다. 일본 기업에 수입 대금 지불은 이미 70년부터 밀리고 있었고 재일 조선인 김원조 씨가 쓴 방북기 <동토의 공화국>에서는 80년대 초에 북한 주민이 이미 심각한 식량 부족,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현실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었다.

그러나 당시 남북한의 대립이 매우 심했고 한국의 전두환 정권이 독재적인 정치를 하기도 해 나는 북한에 비판적인 언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저항이 있었다.

그 후 동서 냉전이 종식을 맞아 소련이 붕괴한 1991년을 지나서는 북한 경제는 '심각한 정도가 아닌 파탄' 상황이라고 한창 보도됐다. 동유럽 사회주의권 시장이 사라지고 원조도 끊기고 만 것이 결정타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 자신도 93년부터 시작한 조중 국경 지대의 취재로 수 명의 북한에서 탈출해 온 사람들과 인터뷰하면서 식량, 물자 부족 현상이 위기적 상황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식량, 물자의 부족이 기아의 단계까지 이르러 사망자까지 발생하고 중국에 주민 유출이 시작됐다고 하면 그것은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생존에 근원적인 문제이며 북한 정권의 붕괴, 더욱이 한반도 위기의 가능성도 나온다. "중국에 기민이 유출", "시체가 뒹굴고 있다"라는 정보에 나는 충격을 받고 혼란스러웠다. '그저 소문이었으면'이라고 바랐다.

그 후 여러 한국 언론의 중국 취재 보고에 의해 북한 탈출자가 상당수 발생하고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당시 확실한 정보가 없었다. 언론인도 학자도 거의 누구도 현지에 가 확인하지 않은 것이다. 왜, 언제부터, 어느 정도의 수가 중국에 유출해 오는 것인가? 통제가 심한 북한에서 주민이 탈출하고 있다는 사태는 북한 내부에 어떤 변화가 있었기 때문인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조중 국경 지대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기민이 되어 유출해 온다는 북한 사람들을 만나 내부의 사정을 취재 해야 했다.

97년 7월 나는 5번째의 조중 국경 취재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