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출신의 김릉자씨(오른쪽에서 두번째) 자제가 모친(중앙)의 칠순을 축하하고 있다. 1993년경일까? 풍성한 요리가 차려져 있지만, 모두 여위여 있다.(아시아프레스)

후쿠오카 출신의 김릉자 씨(오른쪽에서 두번째) 자제가 모친(중앙)의 칠순을 축하하고 있다. 1993년경일까? 풍성한 요리가 차려져 있지만, 모두 여위여 있다.(아시아프레스)

 

북한으로 돌아간 在日朝鮮人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가(1) >>>

X씨는 70년대에 ●●조선고등학교 재학중에 함경북도에 일가가 귀국했다. 이미 '자이니치'들의 귀국은 줄어드는 추세였으나, 몸이 좋지 않던 아버지가 조국에서 온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총련의 권유에 귀국선에 타기로 했다고 한다.

“나는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슬프다고 생각하는 정도였습니다. 도착해서 청진에서 배치가 결정될 때까지 대기하는 초대소에 아는 사람을 찾거나 짐을 받으려고 와있던 귀국자들이 '왜 지금 귀국했는가? 조선 생활이 편치 못하다는 걸 못들었나?'라고 입을 모아 말하는 겁니다. 그 후에도 60년대에 귀국한 귀국자들로부터, '당신들 최근 귀국자들은 바보야. 왜 일본 생활을 버리고 가난한 조선에 굳이 오는지'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X씨는 술에 빠져 폭력을 휘두르는 귀국자 남편과 이혼. 90년대에 혼란스러운 가운데에서 아이 둘과의 삶에 한계를 느껴 99년 일본, 일본에 있는 친척에게 직접 지원으로 부탁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향했다. 국경을 넘기 위해서는 국경 경비대에 뇌물을 쥐어주고 중국측 브로커에게도 돈을 줘야만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돈조차 없어 결국 스스로 인신매매 브로커에게 몸을 맡겨, 중국인 남성과 결혼하게 되었다. '도망쳐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X씨는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에서 또다시 팔리거나 일본에 연락을 취하지 못한 채 1년이 지나 결국 공안에 체포되어 북한에 송환되었다.

“취조했던 보위부원(비밀경찰)이 친절한 사람이어서 '겨우 중국에 나갔는데 잡혀오면 어쩌나. 다음에는 실패하지 말고 일본에 돌아가라'고 했습니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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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후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자 X씨는 바로 중국행을 결심한다. 그 때의 그녀의 회상이 잊혀지지 않는다.

“누가 나를 사주지 않을까 싶어서 바로 브로커를 찾아갔습니다. 중국 실정을 알면 다시 가난한 조선에서는 살 수 없어요”

중국에서 연락이 닿은 '자이니치' 친척이 손을 써서 X씨는 10년 전에 일본에 입국했다. 그 후 두 아이를 탈북시켜 관동지방에서 생활하고 있다.

'최근 귀국자' X씨는 필자와 같은 세대이다. 조선고등학교 시절 추억을 묻자, 핑그레이디가 인기였다는 것, 어른 흉내를 내느라 친구들과 카페에 드나들었던 것을 회상하며 이야기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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