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변두리에 세워진 '공산주의로 가자'라는 거대한 슬로건. 2023년 9월 하순 평안북도 삭주군을 중국 측에서 촬영 아시아프레스

2023년 북한의 대중무역 수출 통계에 따르면, 임가공 기반 수출 품목들이 과거 주요 수출품이었던 광물을 뛰어넘어 1위를 차지했다. 아시아프레스는 북한 내부협력자들이 보내준 정보를 바탕으로, 이 같은 변화의 이면에서 북한 임가공 산업의 통계와 숫자에 가려져 주목받지 못하는 근로자들의 노동 환경을 조명하고자 한다. (전성준)

◆ 가발과 속눈썹이 북한 수출 효자 품목으로 등장

중국의 관세청에 해당하는 해관총서의 통계에 의하면, 2023년 기준으로 총 1,680t에 이르는 가발과 수염, 속눈썹 등이 북한을 통해 수입됐다. 이는 약 1억6300만 달러, 한화로 약 2,200억 원 정도로, 2023년 한 해 동안 1월을 제외하고 북한 수출 품목 중 1위를 꾸준히 유지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이 같은 품목들이 이전 대중국 상위 수출 품목인 광물 및 기초화학 제품을 비롯한 여타 수출품 총액을 능가할 만큼 중요하게 부상하고 있다. 2017년 북한의 핵실험과 잇따른 미사일 발사로 인한 유엔의 제재로 광물 수출이 전면 금지된 후, 북한이 새롭게 찾아낸 수출 아이템이 바로 가발과 속눈썹 등 임가공 제품이다.

실례로 지난 2023년 12월의 가발 및 속눈썹 수출액은 1,520만 8,813달러다. 나머지 품목들의 수출 총액인 949만 9,360달러의 1.6배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다. 이에 힘입어 2023년 북한의 대중국 수출액은 팬데믹 이전인 2018년의 2억 1,314만 7,000달러를 상회하는 2억 9,188만 7,000달러에 이르렀다.

북중간 무역액 추이. 중국 세관총서의 발표치를 정리했다. (제작 아시아프레스)

◆ 왜 가발과 속눈썹인가?

가발과 속눈썹이 갑자기 중요 수출품으로 등장한 배경에는 2017년 이후 강화된 유엔 안보리와 미국의 제재가 있다. 제재가 대중국 수출에 미친 영향을 만회하고자 애쓰던 북한에게 2018년 이후 제재에 해당되지 않는 임가공 제품이 새로운 수출 품목으로 등장한 것이다.

2017년 북한의 핵실험과 잇따른 미사일 발사에 대한 유엔 안보리 제재(제2356호, 2371호, 2375호, 2397호)에 따라 해외에 파견된 노동자 대다수가 북한으로 송환되고, 수출금지 품목이 확대되면서 2018년 대중 수출액 규모는 전년인 2017년의 약 17억 2300만 달러의 1/9수준으로 폭락했다. 이후 외화를 확보하기 위한 북한 당국의 몸부림이 시작된다.

북한 당국이 주목한 것이 바로 중국의 임가공 수요다. 아시아프레스 북한 내부 협력자들이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북한에서 임가공 업태가 확대되기 시작한 시점이 대체로 2018년이다. 이 시기 수많은 무역회사가 가발 및 속눈썹 제작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협력자는 전했다.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는데, 무역회사들이 모집 인원들에게 2주간 연수를 시킨 후 일감을 주는 식으로 진행됐습니다. 주로 가발이나 모자, 구슬 장식 같은 것들을 만들었습니다. 가발은 1개를 만드는데 보통 3일에서 1주일 정도 걸리고, 그 대가로 쌀 2kg을 받았어요. 가발 형태에 따라 3~5kg을 받기도 했어요" (2018년 1월 양강도 협력자)

국경 일대의 일부 무역회사에서 소규모로 시작된 임가공 사업이, 최근에는 국가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부족한 임가공 인력을 충당하기 위해 길주, 김책, 함흥 등으로 확장하고 있다고 혜산시 거주 협력자는 전했다.

2023년도 월별 북중간 무역액 추이. 중국 세관총서의 발표치를 정리했다. (제작 아시아프레스)

◆ 비인간적 임가공 노동에 내몰리는 주민

이러한 변화 속에서 북한 주민들의 임가공 노동 환경은 매우 열악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2023년 8월 협력자가 보내온 자료에는 임가공업에 종사하는 북한 주민들의 실상이 생생하게 담겼다.

"식량을 벌기 위해 주야간으로, 조명도 없이 12v LED 등불 밑에서, 그것도 없으면 촛불 밑에서 일하느라 급격한 시력 저하를 겪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어요. 한동안 시장에서 돋보기가 고갈되기도 했어요. 이제 안경 낀 사람만 봐도 ‘가발 하는 사람’이라고 알 수 있을 정도예요"

2023년 12월 협력자의 보고에 따르면, 임가공업을 국가가 본격적으로 통제하면서 회사에서 주는 노임과 식량으로 그나마 생계를 유지하던 임가공 근로자들에 대한 대우가 더 나빠졌다고 한다.

"코로나 이전에는 무역회사별로 임시 혹은 고정 인력을 채용해서 근로자에게 한 달에 쌀 25kg, 콩기름 1L, 100위안을 줬어요"

하지만 국가가 무역을 강력히 통제하게 된 시점부터는 임가공 회사가 제공하는 노동의 대가로 북한산 쌀이나 옥수수 정도만 지급된다고 한다. 과거 무역회사에서 주던 보너스나 인센티브 등 일체의 추가공급이 없어졌다는 설명이다.

임가공 제품이 유엔 제재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만큼 앞으로도 이 같은 북한의 대중국 무역 추이는 계속될 전망이다. 성장하는 무역 통계 뒤에서 북한 주민들의 고통도 더 커진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 아시아프레스는 중국 휴대전화를 북한에 반입해 연락을 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