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은 정권은 식량 유통에서 판매 자율권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국가의 식량 통제권은 더욱 체계화하고 있다. 개인과 농장의 식량 판매의 제한적 합법화, 자체 가격 결정권, 심지어 수출까지 허용하는 파격적 조치를 도입함과 동시에 국가 주도의 식량공급망을 강화해 통제력을 놓지 않으려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성준 / 강지원)
◆ 개인과 농장의 식량 판매 일부 합법화
협력자들의 보고에서 ‘영농물자교류소’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했다. 이는 최근 개정된 북한 법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실체는 무엇일까?
2021년 개정된 북한 「량정법」 제11조는 다음과 같다.
‘…량곡생산기관, 기업소, 단체와 공민이 국가량곡수매계획을 수행하고 남은 량곡과 비경지 또는 터밭에서 생산하였거나 수입한 량곡은 영농물자교류소를 통하여 필요한 영농물자와 교환하거나 판매할 수 있다.’
개인이나 농장이 농사에 필요한 물자를 구입하거나 여유 생산물을 판매 혹은 교환하는 공간으로,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상기법을 통해 제한적이지만 개인 및 농장 차원에서 계획 초과분 양곡에 대한 판매를 합법화했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 농장이 가격 제정에 수출까지 가능해졌다
김정은 정권의 농정 개편에서 가장 급진적인 변화는 「농업법」 제61조에서 찾을 수 있다.
‘농장지표로 생산한 농업생산물과 부업생산물은 정해진데 따라 원가를 보상할 수 있게 자체로 가격을 정하고 판매할 수 있다. 이 경우 자체로 정한 가격은 해당 가격기관에 등록한다.’
※농장지표는 국가계획 이외에 농장 자체의 계획에 따라 생산하는 농업생산물을 의미한다.
한발 더 나아가, 「농장법」 62조에 의해 이제 농장의 수출도 법적으로 가능해졌다.
‘농장은 공예작물을 비롯한 농업생산물을 해당 기관을 통하여 수출할 수 있다.’
※공예작물이란 주로 공업원료로 사용되는 원료 작물을 말한다.
이러한 법률이 만약 농장 현지에 적용된다면, 농장이 시장의 논리에 따라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여기까지 보면 마치 국가가 양곡의 유일적 관리를 포기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김정은 정권은 강력한 국가식량유통망을 구비해 놓았다.

◆ 국가 식량공급망의 확충
식량공급소, 량곡판매소는 현재 북한 당국의 새로운 식량 유통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식량공급망이다.
2021년 개정된 북한 량정법 제45조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중앙농업기관과 지방농업지도기관은 식량공급대상인원의 분포상태, 지역적 특성에 따라 식량공급소, 량곡판매소를 배치하여야 한다.’
흔히 ‘배급소’로 불리던 식량공급소는 과거 북한의 배급제도가 정상적으로 운영되던 시기 주민들에게 거의 무상에 가까운 가격으로 식량을 공급해왔지만 현재는 그 공급대상과 수량이 한정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 법문에서 량곡판매소에 관한 언급은 2015년 당시 법률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김정은 정권이 새로운 농정 개편을 준비하면서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량곡판매소는 과거 김정일 시대에 시장에서의 식량 거래가 급속히 확대하면서 약화된 식량 유통에 대한 국가의 장악력을 회복하기 위해 대체할 목적으로 도입되었지만, 사실상 실패하고 말았다. 아시아프레스의 과거 조사에 따르면 2019년경 시범적으로 다시 도입이 되어 당국의 농정개편이 추진되던 2021~2022년 사이 시장에서 강한 식량판매 단속과 함께 본격적으로 전국에서 가동을 시작했다.
이는 현재까지 국가 식량전매제의 핵심 축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