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과 학계에서 북한의 시장화를 상징하는 주요 키워드로 언급돼 온 ‘돈주’는 ‘고난의 행군’ 이후 등장한 신흥 부유층으로, 시장경제의 성장과 함께 부를 늘려온 북한 시장화의 산아이자 동력이었다.
유통업을 중심으로 시작된 돈주의 영향력은 점차 광산, 어업, 운송업, 부동산업 등 국가에 의해 방치된 경제와 산업의 전반으로 확산했다. 돈주의 시선이 미치는 곳마다 새로운 서비스와 고용이 생겨났고, 유통이 활성화되었으며, 국가 배급이 끊긴 사람들의 어두운 표정을 다시 밝혔다.
하지만 2020년 이후 돈주는 빠르게 몰락했다. 가장 큰 원인은 김정은 정권의 ‘新 경제질서’ 구축이다. 북한 당국이 코로나를 기화로 역사상 유례없는 반시장 정책을 펼쳐 시장은 축소되고 개인의 경제활동은 제한됐으며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돈주가 무너졌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최근 김정은 정권의 ‘新 경제질서’ 아래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세력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新 돈주 계층이라 부르고자 한다.
김정은 정권 아래 돈주의 흥망성쇠에 대해 시리즈로 연재한다. (전성준/강지원)
◆ 돈주는 무엇을 했는가?
북한 시장화의 주역, 돈주의 역할에 대해 한가지 실례를 들어 설명해보도록 하자.
북한에서 한류의 인기가 절정이던 2000년대 후반, 한국 제품은 ‘없어서 못 팔’ 만큼 수요가 높았다. 놀라운 건 한국에서 새로운 영화가 개봉되고 조금만 지나면 영화 속 주인공의 의상을 똑같이 따라 입은 이들이 북한의 거리를 활보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평안북도 신의주의 밀수업자는 한국에서의 영화 개봉과 함께 해당 영상이 담긴 메모리 카드를 중국을 통해 북한 내로 반입한다. 메모리 카드는 여객운수업자가 운영하는 ‘써비차’를 통해 반나절 만에 평안남도 평성의 의류유통업자에게 전달된다.
유통업자는 영화 속 의상 중에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몇 종을 골라 직접 고용한 의상 디자이너에게 전달한다. 의상 도안은 완성되는 즉시 의류 가공업자에게 보내지고 임가공 노동자들은 도안에 따라 가공을 시작한다. 노동자들은 일해서 받은 돈의 일부를 자신이 속한 직장에 바치고 자유시간을 얻은 국영기업 근로자들이다.
생산된 옷은 ‘차판장사’라 불리는 물류운송업자의 컨테이너에 실려 신의주의 도매업자에게 보내진다. 이곳에서 이 옷들은 중국을 통해 수입한 남조선 옷으로 탈바꿈해 청진과 함흥, 원산과 해주 등 전국의 대도시들로 보내진다.
한편 그동안 메모리 카드에 담긴 영화는 컨텐츠 유통업자에게 넘겨지고 수천수만 개의 메모리에 복사돼, 전국의 장마당 근처를 배회하며 ‘좋은 영화 있어요’라고 속삭이는 상인에게 공급된다.
한류에 푹 빠진 한 청년이 단골 상인이 추천한 ‘좋은 영화’를 구매해 몰래 시청할 즈음이면 장마당에는 영화 속에 등장한 의상이 ‘송혜교 코트’, ‘이병헌 잠바’라 불리며 패션에 민감한 젊은이들의 구매욕을 자극했다.
이는 무역과 유통의 주도권이 시장에 있었고, 그 속에서 활약한 밀수업자, 운송업자, 가공업자, 유통업자 등 돈주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 몰락의 서막
돈주의 쇠락이 처음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2019년 4월이었다.
당시 평양에서 중국으로 출장 나온 한 무역업자는 아시아프레스와의 인터뷰에서 평양이 대불황에 처해 있다며 다음과 같이 전했다.
“장사가 안돼서 중구역, 모란봉구역 등 중심부의 시장조차 빈자리가 눈에 띈다. 파탄, 몰락한 부유층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무역상사나 석탄을 수출하던 회사가 많이 망했다”
2017년 북한의 핵실험 이후 시행된 강력한 유엔 제재로 인해 북한의 수출은 직격탄을 맞았다. 특히 북한 대외 수출의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대중 수출액은 2017년의 약 17억 2300만 달러에서 2018년에는 약 2억 1300만 달러로 1/9 수준으로 폭락했다.

제재는 무역에 타격을 안겼고, 이는 연관된 유통 관련 돈주들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 회에서는 연이어 들이닥친 재난이 돈주 계층을 어떻게 철저히 몰락시켰는지에 대해 살펴본다. (계속)
※ 아시아프레스는 중국 휴대전화를 북한에 반입해 연락을 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