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폭 투하로부터 올해로 80년. 생활의 양식을 찾아, 혹은 징용이나 징병 때문에 도일해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살던 많은 재일조선인도 피폭 당했다. 정확한 수는 명확지 않지만, 수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측된다. 22살 때 귀국사업(1959~84년)으로 히로시마시에서 북한으로 건너간 박영숙 씨의 가족도 원폭으로 집이 소실됐고 임신한 올케언니는 폭사했다. 히로시마 제1중학교 재학중 피폭한 넷째 오빠는 북한에서 만년까지도 심적 외상 후 스트레스(PTSD)와 후유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한편, 1990년대에 일본의 동창생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연락이 왔다. 97년 탈북해 지금은 서울에 사는 박영숙 씨와 장녀 임윤미 씨가, 가족의 피폭 피해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홍마리)
◆5살에 본 버섯구름
1940년 히로시마시에서 태어난 영숙 씨는, 원폭이 투하된 날을 잘 기억하고 있다.
"'저게 뭐지?'라고 말한 것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구름이...”
아버지 박덕조(1896년생) 씨와 어머니 김혜란(1903년생) 씨는, 1920년대 경상북도 대구에서 도일, 히로시마시에서 제재소와 맹장지(盲障子)제작소를 운영했다. 영숙 씨는 10남매의 8번 째로 태어났다.
영숙 씨 일가는 현재의 원폭 돔에서 1km도 떨어지지 않은 히로시마시 중구 히로세 키타마치에 살았다. 군항인 구레를 주 표적으로 한 미군의 공습이 시작되자 영숙 씨의 양친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키타히로시마로 소개(疏開)했다. 거기서 영숙 씨는 버섯구름을 목격한 것이다. 미쓰비시조선소의 총무과에 근무하던 큰오빠는 요코하마 출장 중이라 무사했지만, 서울 출신의 올케언니는 지하 방공호로 도망치는 도중 폭사했다. 임신 6개월이었다고 한다.

◆원폭 투하 한달 후 돌아온 오빠
집은 불타버렸지만, 영숙 씨 일가는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고 히로시마시내에서 생활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히로시마 제1중학교에 다니던 넷째 오빠・명달 씨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다.
원폭 투하 후 한달이 지나, 명달 씨가 드디어 돌아왔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 돌아왔구나"하고 가족은 기뻐했다. 원폭이 떨어졌을 때 명달 씨는 친구와 함께 산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그리고 한동안 산에서 고구마를 먹으며 지내다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산에서 내려왔고, 피해자 구출 활동에 동원됐다고 말했다.
물을 원하는 이에게 물을 주고, 사체를 차에 싣는 등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현장이었음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돌아온 명달 씨는 정신과 병동에 1개월 입원했다. "불타는 시체, 울부짖는 사람들... 그런 광경이 계속 생각나 환각에 시달렸다고 합니다"라고, 조카인 윤미 씨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