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4월 28일 북한 당국이 러시아 파병을 처음 공식 인정한 이후, 평양에서는 전례 없는 ‘영웅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다.
북한 관영매체는 지난 4월 이후 파병 장병들에 대한 표창 수여식과 축하공연, 파병됐다 숨진 장병의 유가족을 위로하는 행사 등을 연이어 방영했다. 그 진위는 불명이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북한 당국은 김정은 시대의 ‘새로운 영웅’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는 모습이다.
김정은 정권이 기획한 ‘새로운 영웅’은 과거와 어떻게 다르며 어떤 서사로 포장하고 있는지 살펴보자고 한다. 새 영웅 만들기의 화려한 무대 뒤에는 과연 어떤 목적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전성준 / 강지원)
◆ 달라진 영웅의 문법
북한은 영웅의 계보를 갖고 있다. 항일무장투쟁 시기의 영웅은 제국주의 일본이라는 명확한 적과 '조선의 해방'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고, 6.25 전쟁의 영웅은 '미제'와 '남조선 괴뢰'라는 적과 '조국 통일'이라는 목표가 있었다. 과거 영웅에 공통적인 것은 조선 민족을 위해 조선의 땅을 지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파병 영웅’은 다르다. 이들이 목숨을 바친 곳은 조국이 아닌 외국이었고, 지켜낸 것은 '조선 민족'이 아닌 '러시아'였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 당국은 과거 영웅의 문법에는 맞지 않는 ‘러시아 파병 영웅’이라는 일종의 ‘돌연변이’를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셈이다.
북한 당국은 이 돌연변이를 국제 연대라는 새로운 명분으로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80년 이상을 외부와 차단된 채 민족주의를 고취해 온 북한 주민에게 국제 연대라는 가치가 얼마나 설득력 있을지 의문이다.
북한 당국도 이것을 잘 알고 있기에 ‘영웅’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과거 나치 독일을 능가하는 프로파간다로 전 국민을 세뇌하고 있는 북한에게 사실 영웅 하나 만들어 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조선중앙TV가 공개한 영상을 보면, 이를 위한 북한 선전선동의 정교한 연출을 찾아볼 수 있다.

◆ 김정은의 획기적인 이미지 연출
새로운 영웅을 만들기 위한 연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도자와 영웅의 관계 설정이다.
8월 21일 평양의 4.25문화회관에서 열린 축하공연은 북한 선전사상 획기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공연 중간에 김정은이 전사자들의 관(안에 실제 유해나 유물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을 직접 쓰다듬으며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카메라로 담아냈다. 이는 과거 김일성, 김정일 시대 북한의 선전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연출이다.
북한에서 살았던 기자의 경험으로, 북한의 공식 행사에서 죽음은 늘 추상적으로 다뤄졌고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식의 관념적 표현으로 포장됐다. 하지만 이번 영상에서는 관이라는 실체를 통해 죽음을 구체화하고, 그 위에 덮인 국기와 애국가를 통해 죽음을 국가와 연결시키며, 그것을 쓰다듬는 김정은의 손길을 통해 신성화한다.
특히나 파격적인 연출은 전사자의 사진(진위 불명) 앞에 무릎을 꿇고 영웅 메달을 달아주는 김정은의 모습이다. 최고지도자가 무릎을 꿇는다는 것 자체가 북한 정치문화에서는 커다란 변화다. 영웅을 향해 무릎을 끓으면서 애도하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통해 영웅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