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 일가가 심양 일본 총영사관에 진입한 순간 (교도통신)

 

시작하며

본 연재는 2002년 8월에 출판된 '북한난민(講談社現代新書 고단사 현대 신서)'을 복각해 게재한 것이다. 통계 숫자나 용어는 특별히 수정하지 않아 간행 당시의 내용 그대로임을 유의해 주었으면 한다.

1990년대 후반, 미증유의 사회 혼란과 기근=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이와 동반해 시작된 북한인의 중국 탈출은 해마다 증가해 중국, 한국뿐 아니라 일본, 러시아, 몽골과 동남아시아 국가까지 흔드는 큰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이로부터 이미 20년이 지났다.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의 수는 누계 3만 명을 넘어섰다. 북한 민중이 어떻게 조국을 버리고 난민이 되었는가. 그 원인과 과정을 다시 한국의 독자에게 알렸으면 하는 마음에 2002년에 발간한 책을 웹상에서 복각하기로 했다. (이시마루 지로)

'심양 사건'의 생생한 영상

중국 요녕성의 일본 총영사관에 북한 난민 5명이 진입을 시도한 '심양 사건'은 원래 인접한 미국 총영사관에서 발발(勃發)하게 되어 있었다.

진입이 실행되기 11일 전인 2002년 5월 6일. 탈북 난민인 김광철 일가를 보호해 온 한국인 문국한 씨로부터 일본에 있는 나에게 국제 전화가 걸려왔다. 진입 목표를 미국 총영사관에서 일본 총영사관으로 변경했다, 현장에 와 취재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연락이었다. 미국 총영사관은 경비가 삼엄해 늙은이와 여성, 아기를 데리고는 도저히 무리라는 판단에서다.

"옆에 있는 일본 총영사관은 비자 신청자 때문에 주간에는 사람이 통과할 수 있게 문을 열어놓고 있어요. 이걸 보고 아, 일본이 손을 벌리고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이것도 신의 뜻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여러 사정으로 현장에 가지 못한 나에게 문 씨는 후일 목표 변경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일본과 중국의 외교 마찰로까지 비화됐던 '심양 사건'은 면밀한 계획에 의해 실행되었다기보다는 결과적으로 지원자의 현장 판단으로 중대 사건으로 발전한 것이다.

5명의 북한 난민이 진입을 시도한 순간은 한국 연합통신과 일본 교도통신에 의해 촬영되어 생생한 현장 영상이 세계를 누볐다. 무대가 일본 총영사관이어서 일본은 꼼짝없이 당사자가 됐다.

이 사견을 계기로 일본 정부 외무성의 은폐 체질, 대중 외교의 자세, 폐쇄적인 일본의 난민 정책 등이 일본에서 집중적으로 논의 됐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동안 일본에서 별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북한 난민의 존재가 드러난 것이 '선양사건'이 결과적으로 이룩한 최대의 성과였다고 보고 있다.

영상의 힘은 강하다. 총영사관 입구의 수미터 사방의 공간에서 경비인 중국 무장경찰의 제지를 혼신의 힘으로 뿌리치는 2명의 여성과 어린 아이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필사의 각오로 구원을 청하는 북한 난민의 존재를 강하게 알렸다.

또 진입 결행 수일 전에 지원자에 의해 촬영된 5명의 인터뷰 영상은 북한에서의 삶의 어려움, 북한에 송환되었을 때의 처벌의 공포, 자유로운 곳에서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육성으로 전했다.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북한 난민의 모습 일단이 영상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