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강 두만강을 끼고 좌측이 중국 도문시, 우측은 북한의 온성군. 2012년 7월 촬영 박영민(아시아프레스)

중국의 조선족

2개의 강 중 두만강의 중국측은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이다. 자치주 내 인구의 약 4할, 약 85만 명이 조선족이다. 국적은 중국이다.(2002년 당시)

조선민족이 중국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엽에 새로운 개간지를 찾아 조선에서 도강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리고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 지배하면서 곤궁한 농민이 대량으로 월경했다. 또 마찬가지로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만주'에 국책 이민으로 보내진 조선인도 수십 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조선족은 길림성, 흑룡강성, 요녕성을 중심으로 약 190만 명을 헤아린다. 대다수는 원래 한반도 북부가 고향인 사람들로, 똑같이 남부의 조선인들이 일본에 이주해 재일 조선인이 된 것과 비슷하다. 또 흑룡강성 하얼빈 근교에는 남부 조선 출신자가 많다.
※주: 많은 조선족이 한국, 일본 등 해외와 중국 내 대도시로 이주하면서 연변을 시작으로 동북부의 조선족 인구는 격감하고 있다.

중국 조선족과 북한 사람들은 근현대의 슬픈 역사를 많이 공유하고 있다. 한국 전쟁에서는 약 2만 명에 이르는 중국 조선족 병사가 북한 인민군에 편입되어 한・미군과 싸웠다. 휴전 후 그대로 북한에 남은 청년들도 많아 그들은 중국에 친척이 있다. 또 1960년대에는 중국 조선족의 북한 '귀국' 붐이 있었다.

그 당시의 생활 수준은 조선족의 처지에서 보면 조중간 비슷하거나 오히려 북한 쪽이 좋았던 것 같다. 한국 전쟁에 의해 청장년 남성을 많이 잃은 북한이 노동력 확보를 위해 '조국 귀환'을 권했다고 한다.

또 60년대 후반부터는 중국이 문화대혁명의 혼란기에 돌입한다. 북중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고 중국 조선족 중에는 홍위병에게 '김일성의 특무(스파이)', '민족주의 분자'로 박해 받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정확한 수는 불명이지만, 이렇게 만 단위의 중국 조선족이 현재와는 반대로 두만강, 압록강을 넘어 북한에 건너 갔다. 이 귀국 조선족은 북한에서 다양한 제약을 받았다고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중국 연고자'는 진학이나 취업, 노동당 입당에 제약이 있습니다"라는 말은 과거 중국에서 북한에 귀국해 현재 다시 북한을 탈출한 난민의 공통된 증언이다.

이 점에서도 중국 조선족은 재일 조선인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조선민족은 과거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60년대는 중국, 그리고 현재는 북한의 정치에 우롱당하고 국경의 강을 월경해 온다. 두만강이 눈물이 흐르는 슬픔의 강으로 불려져 온 이유이다.

그런데 이 조선족의 뿌리는 대부분 북한 지역이다. 때문에 북한에 친척을 가진 사람도 많아 북한과 소규모 장사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도 한때는 많았다. 말도 같고 연변 사투리의 원형은 함경도 사투리이다. 북한 난민은 이 조선족 사회에 숨어들어 조용히 살고 있다.

친척이나 지인에 의지에 월경해 오는 사례가 적지 않다. 말하자면  조선족 190만 명의 '인민의 바다'에 숨어든 잠복 생활이다. 하지만 워낙 월경자가 많아 이미 조선족만으로는 난민을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포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럼 먼저 북한 난민이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발생했는지 보기로 하자.

※본 연재는 2002년 8월에 출판된 '북한난민(講談社現代新書 고단사 현대 신서)'을 복각해 게재한 것이다. 통계 숫자나 용어는 특별히 수정하지 않아 간행 당시의 내용 그대로임을 유의해 주었으면 한다.

1990년대 후반, 미증유의 사회 혼란과 기근=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이와 동반해 시작된 북한인의 중국 탈출은 해마다 증가해 중국, 한국뿐 아니라 일본, 러시아, 몽골과 동남아시아 국가까지 흔드는 큰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이로부터 이미 20년이 지났다.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의 수는 누계 3만 명을 넘어섰다. 북한 민중이 어떻게 조국을 버리고 난민이 되었는가. 그 원인과 과정을 다시 한국의 독자에게 알렸으면 하는 마음에 2002년에 발간한 책을 웹상에서 복각하기로 했다. (이시마루 지로)

[고난의 행군과 탈북 난민] 기사 일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