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림성 화룡시의 농촌부 길거리에 보이는 알림판. <비법 월경자를 돕거나 숨겨주지 말 것>이라고 적혀 있다. 1998년 8월 이시마루 지로 촬영

월경자의 무리

조중 국경 지대에서의 취재에서는 어쨌든 한 사람이라도 많은 북한 탈출자를 만나기로 했다. 그래서 국경의 강 두만강과 압록강 변의 도시나 마을을 돌며 언제부터, 어느 정도 수의 북한인이 월경해 왔는지를 탐문 조사하기로 했다. 이 취재는 97년 여름부터 98말까지 간헐적으로 약 150일 간(그중 북한 국내에 25일 간)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보면 중국에 월경해 온 사람이 가장 많았던 시기와 겹쳤기 때문에 북한에서 월경자가 발생하는 주 원인이었던 '대기근' 파악에 큰 성과가 있었다.

취재 방법은 월경자의 인터뷰와 국경 인근 마을의 조사다. 마을 조사는 두만강 쪽에서는 하류의 훈춘시부터 상류의 숭선진까지의 12 지점. 압록강 쪽은 상류의 장백현 등 5개 지점을 선택했다.

97년 여름부터 98년 말까지, 얼마나 놀라운 월경 러시(rush)가 있었는가를 국경 연선의 마을에 사는 조선족의 증언을 취재한 메모에서 몇 가지 언급한다.

"처음 본 것은 95년 11월. 늘기 시작한 것은 96년 이후로 97년에 들어서 매일같이 건너 왔다. 그리고 97년 말 두만강이 언 이후에는 우리 마을만도 하루 평균 40명은 건너 온 것이 아닌가"(화룡현 덕화진 남평촌 전 촌장 이광실 씨)

"97년에 들어서부터 갑자기 늘었다. 매일 온다. 일가 4, 5명이 건너 오는 경우가 많다. 도강에 실패해 익사한 사람의 시체를 매장한 적도 있다"(도문시 신기촌의 김철호 씨)

"매일 밤, 셀 수 없을 정도의 북한 사람이 건너 와 시장의 쓰레기를 뒤지고 있다. 거리의 뒷산에 비닐을 치고 노숙하는 사람도 많다"(장백현 주민)

"이 마을에서만 작년(97년)은 매달 평균 40명에서 50명, 올해는 이것이 하루에 40, 50명이다"(화룡현 덕화진 길지촌의 박광기 씨)

"매일 넘어 오는 것은 분명하다. 조선의 생활이 비참한 것을 아니까 마을 사람들은 식사를 배불리 먹이고 옷을 주었다. 그러나 이렇게 대량으로 넘어 오기 때문에 친절하게 대하는데도 한도가 있다. 자신이 입는 옷, 신는 신발도 없어진다. 그렇다고 당국에 신고할 수도 없다. 마을 사람 중에는 목소리를 높이거나 이사가는 집도 있을 정도이다"(화룡시 개산툰진의 신동훈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