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중 국경 지도

동정심으로 끝나지 않게 되었다

나 또한 취재로 찾은 국경 연선 마을에서 막 도강해 온 월경자 수십 명과 만났다.

화룡현 로과 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김재권 씨의 집을 찾은 것은 98년 4월. 두만강의 얼음은 녹았지만, 북한 기민의 유입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제 난민을 멈추는 것은 누구도 할 수 없어요. 백성이 나라를 버리는 것은 북한 역사의 멈출 수 없는 흐름이 아닐까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김씨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김 씨의 집을 방문한 날 두 명, 다음날에도 두 명의 북한인이 김 씨에게 도움을 구하러 왔다. 3일째에는 이웃 사람이 "우리 집에는 자는 공간이 더 없다"라며 또 다른 2명을 김 씨의 집에 데려 왔다. 이때 나는 김 씨 일가 4명과 6명의 북한 월경자와 일주일 정도 '동거'하게 됐다. 이불도 모자라 혼숙했다.

김 씨의 집 100m 앞에 북한과의 국경의 강 두만강이 흐르고 있다. 이 강을 건너 김 씨가 '조선 손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집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것은 95년 말이다. 급증한 97년에는 인구가 약 1,000명의 로과 마을에 "평균하면 하루 2~3명은 오지 않았을까"라고 말한다.

조선족 마을 사람들은 그래도 굶주리는 동포를 동정해 식사를 주고 숨겨주고 내륙에 가는 사람에게는 버스 요금을 주었다. 하지만 사태는 동정심으로 해결할 차원이 아니었다. 전년 같은 기간에 대비해 98년은 10배 이상의 월경자가 밀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반년간 북한인의 월경은 무서운 기세로 늘어났다. 로과 마을에서만 하루에 50명은 오고 있다. 이제 마을 사람이 도울 수 있는 한계를 넘었다. 곤란한 것은 아이들이다. 아직 4살 정도의 작은 아이도 있다. 제힘으로 강을 넘어오지만, 밥을 먹이고 돌려 보내려고 하면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게 많다. 내버려두면 빈집에 들어가 자고 있다. 부모가 실종됐거나 죽거나 한 케이스가 대부분이다. 불쌍하지만 더 이상 우리는 어쩔 수 없다"라고 김 씨는 말했다. 그도 이사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상황은 주변 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로과 마을에서 조금 하류에 위치한 용연 마을의 정부 직원도 "하루에 50명 정도는 오지 않을까. 아이와 여성이 많다"라고 말했다.

내가 이 집을 방문했을 때 방구석에 전날 밤에 강을 넘어 온 여성이 한명 있었다. 다음 해 99년, 이 정부 직원은 용연 마을의 집을 포기하고 산 하나 넘은 이웃 마을로 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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