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 전면전쟁은 무리

전쟁에 대한 긴장이 없어지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지금의 조선인민군은 전면전쟁을 할 수가 없다'고 북한 사람들 자신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민군의 실상에 대해 정기적으로 조사하고 있지만, 보내오는 보고에서 대부분의 사람이 처음으로 언급하는 것은 병사들의 영양상태 악화. 그리고 열악한 장비에 대해서다.

"올들어 영양실조로 집에 돌아오는 군대가 눈에 띄게 많습니다. 근처에서도 3명이 돌아왔습니다. 그 중 한명은 '굶어 죽느니 부모 곁에서 죽는 편이 낫다. 군 생활은 이제 못하겠다'라고 말합니다"(4월 19일에 통화한 노동자)

"기름이 없어 군의 수송에는 지금도 목탄차가 없으면 안 된다"(20일에 통화한 전직 군인)

인민군에 영양실조가 만연하고 있는 것은 20여년 전부터다. 인민군 병사는 100만 이상, 인구의 5%에 이른다. 김정은 정권은 재정난으로 인해 대병력을 먹일 식량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또 지급된 식량마저 군 간부들이 횡령해 팔아먹는 부정 행위가 성행하고 있어 말단 병사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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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전쟁할 군대는 따로 있어"

병사들 속에서 이런 '자학 개그'가 널리 퍼지고 있다.

김정은 정권은 '군사강국'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미사일 발사 장면이나 병사의 용맹스러운 행진 영상을 교묘하게 써왔다. 핵과 미사일 위협은 물론 심각하지만, 인민군의 실상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 (이시마루 지로)

※1968년 1월. 미국 정찰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에 침입하여 승원 1명 사망, 82명이 구속됐다. 미국은 항모를 보내 승무원의 석방을 촉구했지만, 김일성 정권은 거부, 긴장이 높아졌다. 결국 미국 측이 간첩 행위를 사과하고 승무원이 풀려났다.

1976년 8월. 비무장 지대인 판문점 공동 경비구역에서 미루나무를 자르던 한미 병사가 중단을 촉구하던 북한 병사에게 습격당해 미군 병사 2명이 사망했다. 미군은 항모를 근해에 전개시켜 압력을 가하면서 미루나무 벌목을 감행. 김일성이 유감을 표명하면서 충돌은 회피되었다.

1994년 5~6월. 미국 클린턴 정권은 북한 영변에 있는 핵 시설을 한정 폭격할 계획을 입안. 김영삼 대통령이 공습 반대 주장. 또 방북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에 김일성 주석이 핵 동결을 표명하며 공급은 회피되었다고 한다. 납치피해자 하스이케 가오루(蓮池薫) 씨는 저서 '납치와 결단'에서 당시 평양에서는 등화관제가 실시되는 등 전쟁 발발의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 살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조선인민군이 굶주리는 실태와 구조에 대해서는 장문의 논고 1~8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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