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시 출신 탈북자·박영숙 씨가 8월 3일 서울에서 별세했다. 박 씨는 재일조선인 귀국사업으로 1962년 12월 북한으로 건너갔다. 두 명의 오빠와 두 명의 아들이 정치적 이유로 연행돼 사망했다. 97년 딸과 손자와 함께 탈북해 한국에 입국했다. 북한에서의 가혹한 체험과, 가족이 히로시마에서 겪은 피폭 피해에 대해 공개적으로 증언했다. 향년 85세. (이시마루 지로)

 

사망하기 한 달 반 전의 박영숙 씨. 2026년 6월 서울에서 촬영 (아시아프레스)

◆아버지 임종 지키려 귀국했지만

경상남도에서 도일한 부모님 아래, 1940년 12월 히로시마시에서 10남매 중 여덟 번째로 태어났다. 소개 중이던 히로시마현 야마가타군 아자카에서 원폭의 버섯구름을 목격했다. 히로세 기타마치에 있던 자택은 소실됐고 임신 중이었던 큰오빠의 아내가 폭사했다. 북한으로 건너간 넷째 오빠는 피폭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고생했다.

1960년에 부모와 일곱 형제가 북한으로 귀국했지만, 자신은 사회주의의 부자유를 우려해 귀국을 거부했다. 히로시마에서 보낸 청춘 시절에는 클래식 음악과 연극, 영화를 즐겼다.

박 씨는 22세에 북한으로 건너갔다. 아버지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고, 부모의 임종을 지키고 싶어 1962년 12월 급히 혼자서 귀국했지만 청진에 도착한 19일 전에 아버지는 이미 사망해 있었다. 청진에 마중 나온 오빠는 '왜 왔느냐, 오지 말라고 편지에 썼는데'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북한에 건너가기 전, 일본에 남은 언니 가족과 찍은 사진. 오른쪽 끝이 21세 당시 박영숙 씨. 본인 제공

◆두 명의 오빠와 두 아들이 잇따라 연행돼 사망

가족이 사는, 북한 북서단인 평안북도 신의주에 배치됐다. 가나가와현 출신 귀국자 남성과 결혼해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다.

비극은 70년대에 닥쳤다. 둘째 오빠가 보위부(비밀경찰)에 연행돼 사망했다. 죄명도 알 수 없었다. 그 일에 불만을 입 밖에 낸 셋째 오빠도 끌려가 옥사했다. 게다가 80년대에 장남이, 90년대에는 차남이 연행돼 사망했다. 오빠와 아들의 시신은 가족에게도 인도되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에서의 앞날에 절망해, 97년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출, 한국에 입국하는데 성공했다.

북한에서 손자와 찍은 1장. 탈북하기 전인 1995~7년 경으로 보인다. 본인 제공

◆온화한 박 씨가 감정을 드러낸 순간

언제나 미소 짓고, 몸가짐과 행동이 매우 온화한 분이었다. 필자는 2018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장시간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가족 네 명이 끌려가 목숨을 잃은 힘든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슬픔이나 분노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마치 기억의 상자 속에서 하나씩 꺼내 찾듯이, 사실들을 천천히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박 씨의 이야기를 담은 『증언·북한 귀국자』(슈에이샤)를 가지고 6월 후반 서울 자택을 찾았다. 책의 완성을 기뻐하던 박 씨는, 자신의 프로필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오빠 두 명, 아들 두 명이 연행돼 사망했다'라는 부분을 읽자 흐느끼며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라고,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시대와 정치에 농락당한 일생

고인이 된 박 씨의 이야기를 적은 취재 메모를 읽어 보면서, 이 재일조선인 일가를 덮친 수많은 부조리에 관해 다시금 생각했다. 가족이 히로시마에서 입은 원폭 피해, 일본에서는 가능성이 희박했던 고등교육을 북한에서 받고 싶다는 형제들의 절실한 희망이 귀국으로 이어졌다. 일본과 한국, 그리고 북한으로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게다가 북한에서 가족이 당한 정치적 살인...

박 씨 본인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도 없었던, 수많은 짐을 짊어져야 했다. 정치와 시대에 휘둘린 일생이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북한에 귀국한 9만 3천 명의 재일조선인은 어떻게 살아갔는가?
<북한으로 간 피폭자>집은 불타고 임신한 올케언니는 폭사 "함께 북한으로 귀국한 오빠는 평생 후유증에 시달려" 탈북민 박영숙 씨가 말하는 원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