このような'差押'は、もともとの住宅制度では全く不可能なことであった。だが、国家統制機関の役人であっても、賄賂をくれた'差押者'の味方になってしまったのだった。このようにして、差し押さえという一種のリンチが、公権力による不正的保護下に白昼に行われたのだ。

もうそこには、没落した食糧配給制度の上に立っていた旧時代の政治的権威など、カカシも同然だった。この無秩序では"山犬(強盗を指す)や狐(詐欺師)になれなくては、とうてい生存競争に勝つことはできなくなった"と、異口同音に、全国民が話していたのである。

こうして、多くの健全な党員と知識人、技術者が自らの死を選択して、自宅のオンドルで静かに目を閉じたのだった。
旧時代の"核心分子"たちの"直播"平葬(つまり自殺)は、犯罪に染まることすらできない"つける薬のない人種"という大衆の揶揄と、国家によって無視され放棄されるという冷たい仕打ちによって、時代の大変化と体制の崩壊を、今も世界に伝えている。 (2006/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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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하지만 나에게 열려 있는 길은 그 선택지 이외 없었다. 취직이면서도 수입이 없고, 그래도 아무 대책없는 전사회 패닉크 "고난의 행군", 누구나 범죄자, 죽음, 코체비의 리정표로만 가야 하는 50년 공화국의 종막은 이렇게 올랐다.

95년부터 직장에 나와 있는 자는 "일등머저리"로 되였다. 내가 근무하던 공장대학(종업원이 수만명 이상되는 대기업에 있는 고등교육기관)은, 학생이 로동자와 하급간부들인데, 자연적 휴교상태였다. 상급공무원인 교원에 대한 국가 지불도 소리없이 소멸하였다.
"해고"는 안되였는데, 나 같은 출근자를 보는 간부들의 눈에서, 아직도 국가에 손을 내미는 <항일유격대식 자력갱생 혁명정신 부족>의 랭기가 느껴졌다.

그랬다. 대학의 실험 자재며 설비 등은 다 도난되여, 관리자들과 그 방조자들의 <자력갱생> 사유물로 전락되였다. 어두운 밤에도 인간의 힘으로 쉽게 움직일수 없는것들을 다 이동해야 할 정도로 바쁜 그들에게, 대낮에 할일도 없이 직장에 나오는 평교원이 큰 장애거리였다.

밀주로는 생계를 이을수 없음이 명백해진 95년 여름, 나에게는 2중의 불행이 찾아 왔다. 그 밑천은 전해 가을, 일본에서 송금이 있어 여유있는 귀국자로부터 꾼것이였다. 95년 겨울은 세상을 180도 뒤집었다. 동면에서 깨여 난듯 이제껏 없었던 고리대 야미금융 관행이 북조선에 혜성처럼 나타났다. 민간에서 "월30%리자"금융, 그것을 부채질하듯 국가는 "실리", 이것이 새해 새구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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